광복 80주년과 탄핵 열차 

중민재단 홈페이지 / 2025.1.5 / 말과 글 82번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다. 서구의 계몽사상이 빛의 개념에서 연유했듯이 동아시아의 광복도 미래를 여는 큰 빛은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빛이 있는가? 새 해와 함께 대통령 탄핵열차가 본격 가동될 것이다. 따라서 탄핵열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빛을 찾아야 하는가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출발점에서 우리는 어두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윤석렬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그 뒤를 이은 탄핵 그리고 체포시도를 둘러싸고 심각한 정치혼란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혼란을 유신시대의 돌진적 유령과 정치적 탈바꿈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993년 <맑스의 유령>을 펴낸 프랑스 철학자 작 데리다는 유령은 항상 역사로부터 소환되며 죽은 듯 살아 있고 막강한 실재이자 허구라고 보았다. 유령은 상대를 끊임없이 협박하며 함정으로 유인한다.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유령은 계엄 같은 긴급조치다. 과거에는 이것이 남발되었다. 오늘 같은 민주화와 다원화 시대에 정당을 획일적 1인 지배체제로 바꾸는 것도 과거의 돌진적 유령에 속한다. 우리는 40년에 걸친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런 유신 시대의 유령을 추방했거나 추방하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놀라운 돌연변이가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도했던 돌진적 근대화의 유산이 돌진적 정치문화의 유령으로 되 살아난 것이다. 보수적이라는 여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야당에서도 이 유령이 독무대처럼 휘젓고 다닌다. 그러니 어찌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이 유령은 정치인들에게 속삭인다.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적을 향해 돌진하라. 그리고 정복하라. 전면전을 불사하라. 돌진적 정복의 유혹은 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윤석렬 대통령의 계엄선포가 단적인 보기다.

이것은 개헌 같은 제도개혁으로 현재의 난국을 벗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의 궤적을 따라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욕망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한 쪽은 선이고 다른 쪽은 악이라는 조야하고 단순한 이분법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고통스럽게 발견한 것은 윤대통령의 계엄선포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정치행태가 놀라울 만큼 돌진적 방식의 정치체질을 재현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점이다.

물론 국회의 탄핵을 거쳐 헌법재판소의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윤석렬 대통령과 위세 당당한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위상은 현저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혈투를 벌리는 사이, 점차 서로를 닮은 거울상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함정을 파는 것은 상대의 약점 또는 과도한 집착을 이용하는 전략이다. 약한 고리를 계속 강타하면서 상대를 함정으로 유인한다.

의회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권력 자원을 이용하여 윤석렬 대통령과 부인 그리고 정부를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공격했다. 이것은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한 반격이지만 정당운영의 방식은 돌진적이고 정복적인 정치문화의 유령을 소환한 셈이다. 이 유령은 상대를 압박하면서 함정으로 이끈다. 흥미로운 점은 국정의 어려움에 직면한 윤대통령이 어쩌면 계엄의 방식으로 대응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 민주당이 상황을 주시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계엄의 가능성을 공개 거론한 것은 상대가 이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을 사전 경고한 의미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함정을 파놓고 각료 탄핵이나 예산 삭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코너로 밀어붙인 측면도 있다. 그런데 윤대통령은 그만 이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자 과오로서 그는 스스로 몰락하는 길을 택했다. 이로서 민주당은 대세를 장악하는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대통령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그 역시 민주당을 유사한 함정으로 유인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국회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계엄을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해석하면서 동조자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주문함으로써 장기전에 대비하는 메시지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전략적 판단을 뜻한다. 즉 민주당이 선호하는 조기 대선에 어긋나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이런 장애를 조기 제압하기 위해 민주당이 탄핵열차의 과속 페달을 밟도록 유인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령 간의 전쟁을 볼 수 있다. 돌진적 정복의 유령이 윤대통령을 계엄의 함정으로 유인했듯이, 장기전을 부추기는 또 다른 유령이 이재명 대표를 줄 탄핵 같은 함정으로 유인했다. 민주당은 결국 이 함정에 빠졌다. 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지혜롭게 관리하지 못한 채 한덕수 대통령직 대행을 즉각 탄핵하는 등 힘을 과용함으로써 민주당은 정국불안을 가중시킨다는 비난을 자초했다. 아울러 민주당이 통치할 경우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윤석렬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돌진적 근대화의 유산, 즉 눈앞의 목표를 조기 달성하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매진하는 정치문화가 오늘의 파국적 혼란의 배후에 작용하고 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민주화 40년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계엄과 같은 비상수단으로 정치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역사의 박물관이 아니라 정치현실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낙후한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아울러 우리의 정당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약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며 여야 간 또는 정파 간 소통과 협치로 정부를 이끌고자 노심초사했던 김대중 시대의 정치유산이 거의 완전히 실종된 채, 과거의 돌진적 정치문화의 체질이 오늘의 민주당에 이식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역설을 넘어 실로 가공할 돌연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80년대 대학에서 정의와 공정을 외쳤던 정치세대가 대거 수혈된 오늘의 민주당에서 돌진적 정치문화의 유령이 독무대처럼 활보하는 현상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우리는 고심할 필요가 있다.

윤대통령의 12.3 계엄선포와 그 뒤를 이은 정치 혼란의 배후에는 돌진적이고 정복적인 정치문화가 작용한다. 여기서 ‘돌진적’이란 말은 대통령 또는 정당 대표가 선택한 하나의 목표 성취를 위해 다른 가치들을 억압, 희생하면서 가용한 자원과 수단을 총 동원하여 목표의 조기달성을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초고속으로 매진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렇게 형성된 돌진적 행위 습속은 쉽게 변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놀라운 생명력으로 끈끈하게 정치인의 몸에 달라붙어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정치를 이끄는 두 거대정당의 체질이 유사해진다. 눈앞의 목표에 집착하다 보니 그 결과를 성찰할 여유가 없고 마음이 조급해지며, 국민을 통합할 어떤 비전도 내놓을 수 없는 권력 물신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혼란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탈바꿈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겠다. 탈바꿈은 행위자의 선의를 전제하는 개념이 아니다. 좋은 의도가 예기치 않게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대응이 예기치 않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인과 결과의 복합적인 얽힘으로 사회변동을 설명하려는 전략이다. 따라서 탈바꿈은 어느 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자의 선택과 그 선택들이 서로 얽히는 방식에 따라 여러 방향의 탈바꿈이 가능하다.

유신시대의 유령이 윤대통령을 계엄의 함정에 빠뜨렸고 돌진적 정복을 부추기는 또 다른 유령이 민주당을 줄 탄핵의 함정으로 이끈데 서 느낄 수 있듯이, 여야의 정치적 리더십은 부실하고 충동적이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의 얽힘이 악순환의 반복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차 탈바꿈으로 진입한다. 낙후한 정치문화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전환의 욕구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한 보기로, 우리가 타고 가는 탄핵열차가 종착역에 도착하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단순히 누가 이기고 누가 망하는 가의 질문에 못지않게 현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지속 또는 더 악화시킬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탈바꿈의 시작은 잘못된 과거의 청산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서 있건 간에,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의 정상적 운영을 차단하고자 했던 윤대통령의 계엄선포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국헌문란이고 내란의 소지가 있는 중대한 범죄로서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징벌 적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계엄이나 내란에 연루된 인사들을 모두 색출하여 처벌한다고 해서 오늘의 정치혼란이 근원적으로 극복되고 안정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인가? 선뜩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오늘의 혼란의 배후에 돌진적 정치문화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사태가 얼마전지 재현될 수 있다. 분열된 사회 안의 각 조직이 자체의 목적추구를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배타적으로 질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에 깊게 내장된 이 풍토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 가에로 모아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국민공동체의 복원이 아닌가 한다. 가족공동체, 친구공동체 등은 우리사회에서 나름대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시민의 연대로 상상할 수 있는 국민공동체는 정치권의 극심한 분열로 인해 전혀 체감되지 않는다. 1960년 4.19 혁명, 1987년의 민주화 항쟁, 2016년의 촛불 시위에서 국민통합의 에너지가 분출한 적이 있었지만 이를 새로운 정치문화로 정착시키는 정치권의 능력은 매우 저조했다. 아마도 국민의 마음이 지역, 이념, 젠더, 정파의 차이를 넘어 순수한 열정으로 결합하여 국민공동체를 체감할 수 있었던 계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12.3 계엄파동과 그 후의 정치현실에서 국민공동체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며 출구를 못 찾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탈바꿈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정치문화의 쇄신이 필요하다. 그 요체는 국민공동체 형성의 필수조건으로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소통정의에 있다. 한 보기로, 내란죄의 혐의를 확대시켜 이에 연루된 자를 모두 색출하여 처벌하겠다고 서두른다면, 자칫하면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그러면 정치 분열은 더 심화되고 국민공동체의 형성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 대신 우리는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피력하고 그 견해를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상보성의 원칙이 관철되는 소통정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분열의 심화를 막는 길이다. 아울러 계엄이라는 잘못된 경로 선택에 작용했던 배후의 정치 불안을 세심히 살피면서 이런 선행요소가 재발되지 않도록 서로가 협력하는 것이 미래를 향한 올바른 길이다.

그 길을 우리는 개념적으로 제2근대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돌진적 근대화의 부작용을 넘어 더불어 사는 공존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그 핵심은 소통정의의 실현에 있다. 이런 발전 개념과 목표 및 방향이 뚜렷이 정립되어야 현재의 위기를 보다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요컨대, 국민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는 배타적 정치문화의 극복이 절실히 요구되며 이를 위한 철학과 방법론은 소통정의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광복 80주년의 탄핵열차를 타고 가면서 잘못한 사람을 엄히 다스리는 징벌 적 정의를 구현하면서도 우리의 고질병인 배타적 정치문화를 답습하거나 악화하는 결과를 내지 않도록 소통정의에 세심한 관심과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광복의 빛 개념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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